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,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.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덕수 이씨 (문단 편집) == 분파 == 여러 분파가 있지만 그중 가장 유명한 파가 13세손 '''[[율곡 이이]]'''를 파조로 하는 문성공파(文成公派), 12세손 '''[[충무공 이순신]]'''을 파조로 하는 충무공파(忠武公派)이다.[* 거기다 [[신사임당|50000원도 덕수 이씨의 부인이었으니 참으로 화폐에 올라갈 만한 위인들을 많이 배출한 가문이라고 하겠다.]]] 문성공파의 경우 특이한 점으로 이이의 적자가 아닌 서자가 계승하였다. 이이에겐 적자가 없어서 임금인 [[선조(조선)|선조]]의 명으로 이이의 서손이 봉사손으로 지명되어 그 족보가 후대에 이어진 형태다. 조선 중기 이후의 사대부 집안에서는 적자가 없을 경우 서자가 있어도 따로 양자를 둬서 가문을 계승하는 경우가 많기 때문에 이이 집안의 사례가 특이한 편이다. [* 다만 이는 [[주자가례]]에 따른 것으로, 주자가 주자가례를 집필한 송대의 풍습상 가문의 계승 우선순위는 적자가 없을 경우 서자가, 서자도 없을 때 비로소 양자를 들이는 것이었기 때문에 이이의 가문도 주자가례의 규정에 충실하게 서자가 가문을 계승한 것 뿐이다. 오히려 조선 중기 이후에 양반들이 '천출이 가문을 계승하는 것'을 기피하는 풍조가 생겼기 때문에, 주자가례의 규정에도 불구하고 서자를 건너뛰고 양자를 들여 가문을 잇게 한 것이다.] 충무공파의 경우 이순신의 영향으로 임진왜란 이후 조선의 유명한 무신 집안으로 자리잡았다. 무과 급제자만 267명이고, 역대 [[삼도수군통제사]] 중 13명이 덕수 이씨이다. 종가는 아산 [[현충사]] 인근의 이순신 고택이다. 충무공파와는 달리 문성공파의 경우 남한에는 그 수가 상당히 적은 편이다. 율곡 이이의 본가가 [[황해도]] [[해주시]] 인근에 있었다가 남북 분단 당시 월남한 후손들만이 남한에 있기 때문이다. 문성공파의 종가도 고택이 아닌 경기도 고양시의 평범한 아파트에 자리를 잡은 형편이다. 덕수이씨는 [[조선]]조에서 문과 급제자 105명, 상신 7명, 대제학 5명, 공신 4명, 청백리 2명을 배출하였는데 상신[* 영의정/좌의정/우의정] 7명과 대제학 4명은 연헌공파(蓮軒公派)[* [[이행]]과 [[이기(조선)|이기]]의 아버지인 이의무(李宜茂)가 파조이다. 연헌공파 안에 문정공파와 문혜공파가 있다.]가 배출하였고, 대제학 1명은 문성공파(文成公派)[* 이의무(李宜茂)의 둘째형인 이의석(李宜碩)의 후손인 율곡 선생이 파조.]의 [[율곡 이이]]가 역임하였다.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-BY-NC-SA 2.0 KR으로 배포하고,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.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.캡챠저장미리보기